정진일기精進日記
어려서 일기 쓰는 게 그렇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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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욱 개인전
정진일기精進日記
어려서 일기 쓰는 게 그렇게 싫었다.
그러나 이제 일기 쓰기 위해 산다.
매일 일기를 쓰려면 뭐라도
쓸거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작업을 한다.
일기로서의 작업, 작업으로서의 일기.
매일 붓으로 글씨를 쓰고,
매일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매일 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
매일 쓰고, 그리고,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생각들을 짧은 글로 적었다.
그리고 매일 sns에 공유했다.
이 전시는 그 결과물들을 추려서
다시 펼쳐놓은 것에 불과하다.
숨겨놓은 비장의 카드? 그런 거 없다.
말하자면 공개일기요, 재방송이다.
지난 1년, 정진의 시간이었다.
부러 정진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정진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정진 일기다.
지난 1년 정진의 시간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경지산방에서 허욱 두 손 모음.
<글씨>
매일 두 점 이상 꼬박 1년을 썼다.
모아놓고 보니 근 800점에 달한다.
펼쳐놓고 보니
불과 반년 전의 글씨가 부끄럽다.
물론 최근에 쓴 글씨도
시간이 가면 또 부끄러워지겠지.
과거가 부끄럽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한 것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쓸 때 의도한 바는 아니나
써놓은 것을 종류별로 분류해보니,
몇개의 범주로 나뉜다.
매일미사 성경말씀을 썼다.
이 말씀이 나를 붙들어주었다.
소소한 일상에서 든 생각을 썼다.
가능하면 내 얘기를 쓰려고 하였고,
남의 얘기라도 내 생각을 덧붙였다.
같이 글씨 쓰는 이들을 위해
'변방의 붓소리'라는 쓴소리도 썼다.
그리고 가끔 내킬 때 그림을 그렸다.
곁에 걸어두고 오며 가며
의미를 되새겨 보면 좋을 글씨들을
선별하여 종류별로 부끄러이 내건다.
<그릇>
정지용의 시 [향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게 바로
내가 만드는 그릇의 지향점이다.
도예가라면 다들 어떻게 하면
예쁘게, 독특하게 만들까 고민하고,
또 그렇게 만든다 한들
팔릴까 말까 하는 시대에
아무렇지도 않은 그릇이라니…
굶어죽기 딱 좋은 컨셉이다.
난 잘 모셔놨다가
특별한 날에 꺼내 쓰는
특별한 그릇이 아니라,
허구헌날 물 마를 날 없는
일상의 그릇을 만들길 원한다.
그것이 식기이든 다기이든 주기이든
상관없이 늘 부담없이
손에 잡히는 그릇 말이다.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곁을 지키는
소박하고 덤덤한 친구 같은
그런 그릇 말이다.
그러나 그건 언제나 내 바람이고
그릇은 늘 사용자에게서 완성된다.
주인은 따로 있는 법.
그릇에게 있어 가장 큰 찬사는
달그락, 달그락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