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山中日記
대학 교수 시절, 내 퇴직 후의 꿈은 조용히 글씨 쓰고 그림 그리고 그릇 만들며 사는 것이었다. 내 소원이 너무도 간절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믿고 따르는...더보기
허욱 개인전
산중일기 山中日記
대학 교수 시절, 내 퇴직 후의 꿈은 조용히 글씨 쓰고 그림 그리고 그릇 만들며 사는 것이었다. 내 소원이 너무도 간절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믿고 따르는 그분이 나를 너무도 사랑한 탓이었던지, 내 소원은 내가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급작스레 이루어졌다. 그분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살던 곳을 떠나라 했던 명령처럼,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학교를 갑자기 그만두게 된 것이다. 나는 당혹스런 마음을 뒤로 하고, 염치불구 지체 없이 경기도 안성에 있는 친구 농장에 기어들어가 바로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딱 1년 전의 일이다.
매일 글씨를 쓰고 또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릇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렇게 봄을 맞아 보내고 무더위가 찾아올 무렵, 지인과 그분의 도움으로 서울 대학로에서 그간 해왔던 것들을 추려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제목으로 초대개인전을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상반기 결산전이랄까. 전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게는 반년의 삶이 그야말로 난(亂)이었다.
하반기 결산전인 이번 전시의 제목을 [산중일기山中日記]로 잡았다. 산중이라 말하니 호젓할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난이 끝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보다 더 혹독한 궁핍의 난을 겪고 있다. 그러나 산중에서 얻는 소소한 것들이 제법 있어 그것으로 전시장의 빈 공간을 채웠다.
먹물에 붓을 찍어 휘둘러 쓰고 그린 내 글씨와 그림들은 나의 오감을 통해 들어온 외부 자극을 수용하여 묵상을 통해 자아낸 결과다. 내 그릇들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다. 그저 여염집에서 편히 써주길 바라는 마음만 담았다. 그런 매일의 작업들을 그날그날 SNS에 공유했다. 어차피 완벽이라는 것은 없으니, 그저 삶의 여정만 담담히 보여주자는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썼다.
내게 작업은 창작이라기보다는 일기요, 노동이요, 농사다. 따라서 내게 전시라는 것은 추수한 알곡과 푸성귀를 늘어놓는 시골 장터의 좌판에 다름 아니다. 매번 한해 작품농사 잘 지어서 빛나는 열매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올해 작황도 거둔 후에 보니 솔직히 그저 그렇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저 성실히 농사졌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2018년 겨울 경지산방에서 허욱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