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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딕토 (01): 거룩한 동굴 | 2026-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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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교회사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보살피려 했던 ‘이름 없는 대중’이 만들어낸 역사가 아니다.나는 교회사가 선택받은 성자들이 인류의 욕심과 이기주의, 지적 교만이라는고집스런 관성과 씨름해온 기록이라고 본다. 물론 선택은 모두가 받는다. 하지만 그 선택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겸손한 이들은 소수다. 교회사는 그 위대한 성자들의 역사다. 서기 500년대 초, 소란스런 세속의 가장자리에서 영의 불꽃을 앞쪽으로 빼꼼히 내밀고 있는 겸손한 한 사람이 있었다. 우후죽순(雨後竹筍). 비가 온 뒤에 여기저기 솟는 죽순이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수도생활(봉헌생활)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불씨가 당겨졌다. 수도원 설립 러시(rush)가 이어졌다. 이제 수많은 이가 수도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진정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해방된 뒤) 광야에서 우왕좌왕 수비아코의 거룩한 동굴(사크로 스페코, Sacro Speco) 수도원. 베네딕토가 처음 3년 동안 은수생활을 했던 곳이다. 했을 때 하느님이 십계명 법을 내려주신 것처럼, 수도자들에게도 법이 필요했다. 수도생활을 위해 일상에서 탈출은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만큼 틀이 필요했다. 시대가 그를 요구하고 있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중재자가 모세였다면, 서기 500년대 수도자와 하느님을 연결하는 중재자는 베네딕토(Benedictus, 480~547)였다. 이 베네딕토에 대해 이관술은 「이탈리아 수도원 기행 1」(생활성서, 2025)에서 “나의 하느님에서 우리의 하느님으로의 전환”이라고 평가했다.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던 수도생활이 공동체 차원으로 도약하는 분기점에 베네딕토가 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는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농촌 마을 누르시아(Nursia)에서 태어났다. 농촌이긴 했지만, 베네딕토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베네딕토는 부모님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수도 로마로 말 타고 유학을 간다. 그것도 유모까지 대동하고. 로마로 향하는 베네딕토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 로마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는 로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500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이 그러하듯, 500년이라는 시간은 신념과 열정이 흐트러질 수 있는 긴 시간이다. 당시 로마 분위기가 딱 그랬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열의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태와 향락 분위기가 만연했다. 배울 것이 없었다. 베네딕토는 절망한다. 그래서 그는 그때까지 동행하던 유모와 함께 아필레라는 곳으로 떠난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첫 번째 기적, 즉 하느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생생한 체험을 한다. 그래서 유모를 돌려보내고 혼자 몸으로 찾아간 곳이 오늘날 우리가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거룩한 동굴)라고 부르는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이다. 부처가 보리수(菩提樹, 보디 브리쿠샤, 깨달음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베네딕토는 이 ‘거룩한 동굴’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철저한 은수생활에 들어간 베네딕토를 도운 사람은 로마노(Romanus) 수사였다. 로마노 수사는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빵을 떼어 도르래에 매달아 동굴에 있는 베네딕토에게 내려보냈다. 베네딕토는 그 빵 한 조각 한 조각을 먹으며, 완전한 고독 속에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 특히 정결에 대한 유혹이 심했다. 이에 베네딕토는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뒹굴었다. 그제야 악마의 유혹(정결에 대한 유혹)이 사라졌다고 한다. 해탈한 성자! 육체적 욕망에서 해방된 베네딕토는 은수생활 3년 생활을 접고 동굴 밖으로 나온다. 세상에 나온 베네딕토는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전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베네딕토를 통해 회개했고,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베네딕토에 대한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세상의 모든 물은 깊은 바다를 향하기 마련이다. 참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베네딕토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수도원 원장이 선종했는데, 그 수도원 수사들이 베네딕토를 찾아와 후임 원장이 되어 줄 것을 청했다. 베네딕토는 그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원장으로 취임한 베네딕토가 수도자들에게 엄격한 수도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수도원 생활은 물렁했다. 일신의 안위와 명예를 위해 수도원 생활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위와 명예에 욕심이 없는 베네딕토가 수도원장직을 수락한 것은, 타락해 가는 수도원을 개혁하 겠다는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성에 젖은 일부 수도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고 했지, 우리를 괴롭히라고 원장으로 추대한 것은 아니잖아”라며 수군거렸다. 노 산)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중서부, 로마에서 남동쪽 약 120㎞ 떨어진 이곳이 베네딕토회의 모원(母院) 수도회이다. 하지만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에 도착했을 때 당시 주민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베네딕토는 신전을 파괴하고 성덕의 모범을 통해 마을 주민을 결국 이들이 선을 넘는다.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몇몇 수도자들이 점심 식사 때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베네딕토에게 권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유명한 기적이 일어난다. 베네딕토가 포도주를 마시기 전 성호를 긋자 잔이 깨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590~604)이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Dialogi de Vita et Miraculis Patrum Italicorum)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진짜 일어난 일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베네딕토의 수도원 개혁이 얼마나 어렵게 진행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과정에도, 베네딕토가 이끄는 수도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고, 수도자 수 또한 급증하기 시작했다. 결국 수도원 하나로는 수용할 수 없게 됐고, 베네딕토는 수도원 수를 늘려나갔다. 베네딕토는 이후 525년경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카시노 산)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중서부, 로마에서 남동쪽 약 120㎞ 떨어진 이곳이 베네딕토회의 모원(母院) 수도회이다. 하지만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에 도착했을 때 당시 주민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베네딕토는 신전을 파괴하고 성덕의 모범을 통해 마을 주민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어 기존 아폴로 신전 자리에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St. Martinus) 성당을 세웠으며, 산 정상에 있던 제단은 세례자 요한을 주보로 하는 제2의 경당을 만들어 봉헌하였다. 이후 베네딕토는 547년 3월 21일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다. 그 마지막 날, 성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침대에 눕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면서 최후의 순간을 맞았다. 베네딕토는 이 세상에 많은 보물을 남기고 떠났다. 특히 죽기 전 금욕생활, 기도, 노동 등 수도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규칙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 세계 모든 수도회 규칙서의 모태가 된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베네딕토가 교회에 남긴 영적 보물, 「베네딕토 규칙서」(Regula Benedicti RB - Regula Monachorum)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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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평화신문 2026-08-30 오후 5:55:27 일 발행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