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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17) 레 첼레(Le Celle), 무한한 주님의 사랑이 있는 프란치스코의 독방 | 2026-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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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코르토나는 해발 500m에 자리한 산간 도시로, 기원전 8세기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살기 시작한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1211년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코르토나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일과를 마치고 기도하며 휴식을 취하고 싶어 했습니다. 동료 중 한 명이었던 귀족 출신 귀도 바뇨텔리는 도시 안의 여러 장소를 제안했지만, 성인은 늘 그랬듯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자연에 둘러싸인 한적한 곳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귀도는 도시에서 4km 떨어진 레 첼레(Le Celle)를 추천했습니다. 이곳은 절벽에서 작은 폭포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는 장소였습니다. 이미 6세기부터 은수자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함께 온 동료들과 이곳에 머물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었습니다. 생명의 표징인 물과 믿음의 표징인 바위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곳을 떠나 아시시로 가기 전, 프란치스코는 사순 시기를 보내기 위해 트라시메노 호수 안에 있는 큰 섬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사막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쉽게 찾아오기 어려운 한적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뱃사공에게 자신을 섬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빵 두 덩어리만 들려 있었습니다. 섬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뱃사공에게 아무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또 성목요일이 될 때까지 자신을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 섬에서 나무와 가시덤불 사이에 있는 작은 굴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서 온전히 회개와 기도의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준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목요일이 되자 약속대로 뱃사공은 다시 섬으로 향했습니다. 빵 두 덩어리만 들고 섬에 들어간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떠오르자, 뱃사공은 혹시 굶어 죽은 성인의 시신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다가오는 프란치스코의 손에는, 처음 들고 들어갔던 빵 두 덩어리 가운데 남은 한 덩어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다시 레 첼레를 찾은 것은 1215년의 일입니다. 이번에는 트라시메노 호수의 큰 섬에서 먼저 사순 시기를 보내고, 레 첼레에서 부활절을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그는 포악한 남편 때문에 절망에 빠진 한 여인에게 남편의 회개를 예언했고, 동료들이 자신을 위해 구해 준 새 망토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선종한 해인 1226년, 시에나를 거쳐 아시시로 가기 전 레 첼레를 다시 찾았습니다. 1224년에 받은 오상의 상처와 1225년 폰테 콜롬보에서 받은 눈 수술 때문에 성인의 몸 상태는 매우 위독해 보였습니다. 이에 형제들은 시에나에서 성인에게 마지막 권고와 유언을 적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인의 건강이 잠시 호전되자, 동료들은 성인을 아시시로 모시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정을 좀 더 편안하게 이어 가기 위해 레 첼레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성인은 자신의 영적 삶을 기록한 나머지 유언장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성인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동료들의 결정에 따라 아시시로 돌아온 성인은 1226년 10월 3일 포르치운콜라에서 선종했습니다. 코르토나에서 한참 동안 산길을 걸어 레 첼레 정문에 들어서면, 먼저 놀라움이 앞섭니다. 수도원이 마치 부채꼴처럼 산 중턱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다른 은수 장소들과 달리, 이곳은 정말 은수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장소입니다. ![]() 이탈리아어 ‘Le celle’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작은 방들’을 뜻합니다. 영어의 ‘cell’도 생물학적 최소 단위인 세포를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된 ‘엑셀’ 프로그램의 셀 역시 행과 열이 교차해 만들어지는 작은 네모 공간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레 첼레는 여러 은수자의 독방들이 모여 벌집 같은 형태를 이룬 곳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적어도 세 번 머물며 기도했던 독방은 감옥처럼 답답한 장소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성인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 좁은 독방은 역설적으로 세상 어느 곳보다 넓은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성인의 독방 맞은편, 계곡 너머에는 복자 귀도의 동굴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에서 시중들었던 마르타처럼, 프란치스코가 오로지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돌봐 준 인물입니다. 성인이 선종한 뒤, 코르토나 출신의 엘리아 수사는 프란치스코회의 제2대 총봉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235년 성인의 독방 위층에 성인의 독방과 같은 크기의 방 다섯 칸을 증축했습니다. 자신과 형제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마련한 이 방들은 지금도 거의 같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의 한 분파인 영성파가 이곳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1363년에 파문된 뒤에는 한동안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후 1528년 인준받은 프란치스코회 남자 수도회인 카푸친 작은 형제회가 1537년부터 이곳을 토스카나 관구 수련소로 사용했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프란치스코의 독방과 같은 크기인 가로세로 2m 넓이의 방 20개를 마련하고, 공동 기도를 위한 수도원 성당도 추가했습니다. 이곳은 1992년까지 수련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도 이곳은 여전히 수련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공간은 기도의 집으로 바꾸어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성소자들이 수도원 전례에 참석하며 피정할 수 있는 장소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고요하고 풍요로운 숲으로 둘러싸인 수도원 주변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이곳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 프란치스코의 신앙이 얼마나 깊이 이어져 있는지 느끼게 됩니다. ![]()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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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신문 2026-08-19 오전 9:32:30 일 발행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