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마다 작업하는 양식과 방법이 다르듯이 나는 그 동안 주제에 따라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달리하며 작업을 해 왔다.
뭐 대단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내 작업은 늘 내 삶이 지향하는...더보기
조광호신부 개인전
작가마다 작업하는 양식과 방법이 다르듯이 나는 그 동안 주제에 따라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달리하며 작업을 해 왔다.
뭐 대단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내 작업은 늘 내 삶이 지향하는 주제를 궁구해 보는 또따른 방편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양평 갤러리 카포레에 이은 유리화 전시이고 제 2부는 ‘관조하는 인간( Homo contemplans) 드로잉이고 제 3부는 성모자(聖母子)에 관한 페인팅이다. 특히 이 연구는 교회미술사에 나타나는 성모자 양식을 내 나름대로 패러디하여 그린 작품들이다.
‘절대순수의 상징’으로서의 창(窓)
나의 작업은 물성을 지닌 투명한 유리창 앞에서 열린 또 하나의 창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 인간’(homo viator)의 삶과 호흡의 흔적이었다. 내 작업 안에 열려진 내면의 창은 사찰의 불이문(不二門)에 문이 달려 있지 않듯이 문 없는 창이요,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회전문이 돌아가듯이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창이었다.
그 문은 애초부터 이름 붙일수 없는 무차별성을 지닌 절대순수의 상징으로 ‘하나’를 향해 열린 창이었다. ‘여여(如如)의 창(窓)이라 명명해 보는 이 창 앞에서 내가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은 근현대 서구사상의 악순환의 고리를 극복하고 돌파하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8)사상에서 였다. 특히 길희성 박사가 주도하는 심도학사에서의 마이스트 엑카르트의 연구는 단테가 벨리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을 때처럼 섬광 같이 눈부셨다.
“나에게 이 하나는 ’둘이 아니고 나누어지지 않았으며, 다르지 않다는 것.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어 ‘하나’라고 명명하는 이 하나는 진리(Logos)요, 하느님의 신성이다. ‘하나(Unum)’는 전체로서, 밖도없고 안도없다는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다. ‘하나’는 존재의 충만을 안고 있는 근원적 하나다. 개념 아닌 개념으로서, 언어의 경계에서 어쩌면 ‘하나’라고 말할 수 조차 없는 ‘하나’다. 언어가 끝나고 생각이 끊어진 이언절려(離言絶慮)의 세계에 붙여진 그 ‘하나’를 향해 나의 모든 창조적 행위는 ‘끓어오르는(bulitio) 역동적 실체로부터 부여 받은 ‘영혼의 불꽃(Scintilla animae)’이었다.” (길희성 저. ‘마이스트 엑하르트’참조)
나는 지난 20여 년간 ‘진리의 창’,‘로고스의 암호 (The Code of Logos)’라는 화두를 붙여 작업을 해 왔다. 창이 지니는 적막함과 고요함, 공적(空寂)과 초월성,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있으면서도 없이 계시는 하느님’, 만물 속에 숨어 계신 하느님의 신비한 묘유(妙有)의 배후로서의 하느님을 경외로운 눈으로 바라 보게 되었다.
만물이 그로부터 흘러나와 그로 돌아가는 엑하르트의 텅비고, 자유롭고, 순수한 지성으로의 하느님이 또한 ‘나의 하느님이었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림은 나에게 하늘을 향한 노아의 방주의 창과 같았다. 창이 없는 노아의 방주는 죽음의 방주였겠지만, 빛과 공기를 통하게 하는 방주의 창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감추어진 신성의 어두움’을 향하여 나는 이제 내 작업의 종착지를 향하여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본다.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창, 안과 밖이 따로 없어 한 번도 열린 적이 없고, 닫힌 적이 없는 적막하고 고적한 창. 그 앞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죽는 날까지, 황홀한 외로움으로 서성이는 바람처럼 머물다 가기를 원한다. (작가노트 중에서)